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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Quincy Jones 퀸시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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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계의 프로듀서

퀸시 존스 하면 아무래도 마이클잭슨의 역대 베스트 앨범 Thriller의 프로듀서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팝과 재즈의 대부. 그의 이력은 거의 모든 장르의 대중음악을 포괄하고 있다.

현재는 노년에 접어들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마에스트로 엔리오모리꼬네와 동급의 뮤지션이나 마찬가지로 보인다.

(나이도 비슷하다)

대중음악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정도로 재즈부터 현재까지 활동하시는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음악을 듣기 시작한 시기와 그의 전성기가 겹치지 않아 필자에겐 그저 '거물'이라는 느낌으로만 존재했었는데, 

퀸시 존스의 삶과 여정이 닮긴 다큐를 보게 되면서 그가 존경을 왜 받을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었다.

위대한 뮤지션? 아티스트? 팝과 재즈의 대부? 그렇게 간단히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퀸시 존스
날씬했던 시절의 사진.

 

거의 모든 종류의 대중음악

1930년대 대공황 시기 시카고의 가난한 집에서 자란 그는 트럼펫을 불면서 그의 위대하고 긴 음악 여정이 시작된다.

14살에 밴드에 들어가면서 나이트클럽에서 일하게 되는데 뛰어난 흑인 뮤지션들을 만나면서 꿈을 키워나갔다고 한다.

그에게 유일하게 자유를 준 것은 음악이었다.

연주를 지나 편곡에 흥미와 재능을 발견하여 파리로 건너가 작곡과 음악 이론을 배운 뒤 유럽에서도 밴드를 이끌며 활동을 한다.

미국으로 돌아와 레슬리 고어의 곡들을 프로듀싱하면서 대중음악계에 점점 이름을 알리게 되면서, 영화 음악과 드라마, TV 프로그램의 OST까지 맡으면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간다.

1957년 자신의 첫 리더작 'This Is How I Feel About Jazz'를 발매했다.

1960년대부터는 프로듀서의 커리어를 시작하며 프랭크 시나트라나 레이찰스와 같이 작업하였고 동시에 자신의 작품도 꾸준히 발표해 나갔다. 

1964년 머큐리 레코드의 부사장으로 임명되면서 백인 소유의 음반회사에서 임직원으로 종사하게 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되는데, 

그는 그때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직업을 갖게 되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1979년 마이클잭슨과 함께 '오프 더 월 (Off the Wall)', '스릴러 (Thriller)', '배드 (Bad)'로 세상을 뒤흔들고 국제적인 찬사를 받게 된다.

마이클 잭슨의 프로듀서로 보통 인식되는 것으로 보아, 이 당시가 그의 길고 대단한 커리어중에서도 최고점을 찍었던 때이지 않을까 감히 판단해 본다.

1985년 당대 최고의 스타들을 모두 동원하여 '위 아 더 월드 (We are the World)'라는 누구나 아는 곡을 발표한다.

최단 시간 최다 판매라는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그와 함께한 뮤지션들을 나열하자면, 프랭크 시나트라, 카운트 베이시, 마일스 데이비스, 레슬리 고어, 폴 사이먼, 레이찰스, 아레사 플랭클린, 밥 딜런, 마이클 잭슨...

그와 함께 작업한 이들만 봐도 얼마나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니 미국 내에서 아니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는 뮤지션이며 엔터테인 업계에서 대부의 자리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그의 할머니는 흑인 노예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니...)

그래서 그런지 그는 블랙문화에 큰 애정을 갖고 있다. 

1980년대 institute for Blaack American Music, 즉 흑인음악 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이 연구소의 수익금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예술과 음악 국립 도서관 설립에 기부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 힙합음악이 서부와 동부로 나뉘면서 살인사건까지 발생되자 뉴욕에 심포지엄을 열고 힙합뮤지션들에게 (대부분 흑인들) 제발 멈춰달라는 진심을 전하기도 했다.

적어도 자기 나이만큼은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워싱턴에 흑인역사박물관을 짓는데 큰 역할을 했다.

 

세상이 준 선물

커리어의 성공 덕분에 인생도 화려하게 즐기는 편이신 것 같다. 매년 생일 파티를 성대히 열고,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즐기고 계신다.

그러한 즐거움 속에서 죽음의 고비도 몇 번이나 넘기게 되는데 뇌동맥류의 문제로 트럼펫을 더 이상 불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구급차에 실려가는 경험을 반복하면서도 창작을 이어갔다는 것은 퀸시 존스는 세상이 대중에게 준 선물이라는 뜻일 거다.

그의 음악여정에서 재즈에서 팝까지 그의 손이 안 간 곳이 없다. 방대한 작업량에 뮤지션을 떠나 한 사람의 열정에 한없이 작아진다.

100세에 가까운 연세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아주 더 오랫동안 오랫동안 살아계셨으면 좋겠다.

세대는 다르지만, 현재 같은 지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왜인지 위로가 된다.

 

퀸시 존스는 계속 말한다.

음악은 12음으로 이루어져 있고, 700년 넘게 아직도 12음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음악에 대한 그의 애정과 열정에 그저 작아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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