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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존 스코필드 (John Scofield), 기타 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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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정말 좋아하는 재즈 기타리스트, 존 스코필드.

서울재즈페스티벌 2024년 라인업에 올라와 있어 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10년 전인가 쯤에도 서울재즈페스티벌에 참가해서 그의 짧은 공연을 즐겼던 경험이 있다.

내한 공연을 한다는 그의 소식은 2000년대 초반에 봤던 기억이 있다.

핑거링의 교과서라는 식으로 소개되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그의 이름이 너무 생소해서 아 그런 사람이 있나 보다 하고, 워낙에 재즈에 관심이 없던 필자는 그저 무관심하게 지나간 내한 공연.

인터넷을 뒤져보니 2002년 당시 그의 신작 Uberjam’ 앨범을 발표하면서 동일한 라인업으로 내한하는 내용의 기사가 있다.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그의 앨범이 ‘Uberjam’인데, 헛웃음이 나온다.

당시에 필자는 그의 음악을 들을 정도로 음악취향의 폭이 넓지 않았으니,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후회는 없다.

1996년에도 한국을 찾아 내한 공연을 한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내한 공연이 아마도 그의 첫 번째 내한 공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의외로 한국을 자주 방문하고 있는 존 스코필드가 다음에는 서울재즈페스티벌가 아니라 실내 무대에서 단독 공연을 했으면 좋겠다.

어쨌든, 그는 언제나 팻 메스니와 빌 프리셀과 더불어 세계 3대 퓨전재즈 기타리스트로 꼽힌다.

그의 연주는 블루지하면서 펑키하다. 블루스적인 느낌 뒤에는 비밥과 전통재즈의 라인이 깔려 있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그의 연주가 굉장히 다양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알 것 같다.

섬세하고 솔로를 전개하면서 펼쳐지는 기승전결이라고 할까, 그 구성이 드라마틱하며 강력한 것 같다.

팻 메스니와 빌 프리셀과 외모를 비교하면, 대머리가 되어버린 그가 패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가장 포스 넘치는 외모로 거장의 느낌이 가장 흘러나오는 느낌이 든다.

그가 요즘 텔레케스터를 들고 연주해서 그런지 그것도 한몫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도 거장이지만, 외모에서 오는 분위기는 이제 기타의 도사 수준으로 올라왔다. 

제발 오래오래 음악 활동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john scofield
도사 같은 이미지의 거장 기타리스트

 

스코필드의 생애

존 스코필드는 1951년생으로 오하이오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코네티컷 주 윌튼으로 이사를 했고 거기서 음악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

버클리 음대에서 교욱을 받았으며, 쿨재즈의 상징과도 같은 챗 베이커와 게리 멀리건과 함께 녹음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둔다.

게리 버튼의 쿼텟에서 팻 매시니의 후임으로 연주를 한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1977년 그의 첫 리더작이 셀프 타이틀로 발표되었으며, 1982년에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부름에 응하여 함께 활동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발표된 마일스 데이비스의 3개의 앨범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다양한 아티스트와 협연과 앨범을 발표를 하는데, 스티브 스왈로우, 빌 스튜어트, 데니스 챔버스. 게리 그레인져, 짐 비어드, MMW등과 함께 했다.

특히나 스티브 스왈로우 빌스튜어트와 함께 트리오로 활동했던  ‘존 스코필드 트리오’가 그가 이름을 알리고 음악적 활동의 핵심역할을 했던 밴드 구성 형태일 것이다.

필자는 MMW, 즉 Medeski, Martion & Wood와 함께 한 앨범, <A Go Go>로 존 스코필드 음악세계에 입문했다.

블루스와 락을 듣던 사람에게 매우 생소한 사운드와 프레이징, 드라이브와 코러스가 걸린 음색, 감정을 전달하는 데 있어 재즈와 록의 사운드가 절묘하게 섞인 듯한 안성, 그리고 무엇보다 그 그루브감.

하지만 솔직히 좀 어렵긴 했던 것 같다.

차라리 셀프 타이틀 <John Scofield>가 조금 더 직접적인 이야기를 해주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2006년 내한 공연 전에 관객에게 기타 교습을 간단히 했었다고 한다.

음악을 배우는 것은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다는 설명과 절대 포기하지 말고 매일 연습하라는 것이 가장 인상 싶은 기록이다.

그리고 주변에 자기보단 연주를 잘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는 것도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존 스코필드도 슬럼프가 있었다고 한다. 

힘든 시기나 순간도 물론 있었지만, 결국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면서 극복을 해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역시나 제일 중요한 것은 매일 연습하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세계적인 재즈 뮤지션은 천재성에 성실성이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성공한 모든 뮤지션들의 공통점이 아닐까?

'레이 찰스' 사후 가진 전화 인터뷰의 내용도 참 인상적이었다.

존 스코필드는 11살 때 레이 찰스의 음악을 듣고 음악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레이 찰스의 노래를 듣고 나서 비로소 루이 암스통이나 비틀스 같은 뮤지션들의 음악이 들렸다고 한다. 

레이 찰스는 그에게 음악을 알려준 전도사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존 스코필드의 음악이 블루스나 펑키의 색깔이 짙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가 '레이 찰스'를 기리는 방식의 공연을 했던 것처럼, 10년 후에 후배 아티스트들이 그에게 헌정하는 형식의 공연을 연다면 어떨지 물어보는 질문도 있었다.

돌아온 대답도 매우 흥미로웠다.

우선, 그런 공연은 없을 거라는 것이고, 그가 레이 찰스에게 배운 것은 평생 연습을 통해 기량을 향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음악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운동선수라면 체력적인 노쇠로 평생 자신을 향상 시킬 수는 없다. 

그리고 본인은 (당시에) 55세 밖에 안된 '연습 중'인 재즈 뮤지션일 뿐이라고 했다.

이미 55세의 나이에 슈퍼스타 재즈 뮤지션이 되었는데 자신을 연습 중인 사람으로 낮춘다는 것이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다.

필자에겐 이미 그 당시에 거장으로 보였기 때문에, 도대체 그 사이에 얼마나 기량이 올라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존 스코필드를 거장으로 칭하여도 손색이 없음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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